그들이 과연 다산이 기롱(譏弄)한 잘못된 선비들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
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
성찰해야 할 역사적 이슈가 너무나 많다.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조선 식민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는가.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조약이다.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참선비들이 많아 바른 세상으로 시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서로 다른 비전과 정책의 존재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
비자금 수사 수용거부를 통한 민주선거 보장은 한국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한 토대를 놓았음이 틀림없었다.타협과 연합과 지속성이 확보되지 못한 영역의 유산은 정반대였다.